‘칠곡농원’의 한은 풀리는가

2005년 7월 10일 | 자료집

[한겨레] 1992년 개구리 소년 암매장 거짓제보에 생계 끊기고 가슴에 피멍 들었던 한센인들…“진상조사와 함께 고통 보상해달라” 호소에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순회상담 벌여 ▣ 칠곡=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마을에서 대구 시내로 가는 차편은 하루에 딱 한번뿐이다. 매일 오전 7시5분. 마을회관 앞에 놓인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724번을 놓치고 나면, 걸음으로 마을 밖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이 뚫려 차를 타면 대구 시내까지 10분이 못 돼 닿을 수 있지만,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높고 가팔라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걸어서 오를 수 없다. 마을 어귀에 국가인권위원회가 7월5일부터 이곳을 찾는다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다. ‘무지’라는 흉기가 사람을 잡다 마을 운영위원장 신소식(73)씨는 “그때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뭐하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벌써 13년이 지났지만, 그가 받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사라진 채로 그때 일은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신씨는 “바깥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우리는 누명이 풀릴 때까지 마음 놓고 울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병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지’는 많은 경우 흉기로 돌변해 사람을 죽인다. 1992년 8월21일 아침 7시께 아침 어스름에 잠겨 있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2리 산 70번지에 자리한 ‘칠곡농원’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1991년 3월26일 사라진 대구 성서초등학교생 5명, 이른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17개월째로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이 사건의 수사본부가 꾸려져 있던 대구 달서경찰서 수사과장이 대뜸 마을 이장 김이근(65)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이 터졌다”고 말했다. 전날 오후 5시5분께 경기도 안양시 안양지방노동사무소에 40대 남자가 전화를 걸어 “실종된 개구리 소년들이 칠곡군 지천면 나환자촌 건물 지하에 암매장돼 있다”는 거짓 제보를 한 뒤였다. 몇 시간이 더 흐르자 마을은 전국에서 몰려온 기자·경찰·면사무소 직원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당황한 주민들은 기자들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기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죽여 마을 사람들이 약으로 썼다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 윤영만씨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봤다면 그런 소리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색영장을 든 경찰 60여명이 마을을 이 잡듯 뒤졌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에 지하실이 있는 건물은 한 동밖에 없다는 주민들의 설명은 애초부터 먹혀들지 않았다. 1992년 8월21일 <영남일보> 첫 보도(‘칠곡 나환자촌 건물 지하실에 실종 성서국교생 5명 암매장’)를 시작으로 주민들을 살인범으로 몰아세우는 기사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센병을 앓았던 적이 있는 정상인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주민들의 분노의 목소리는 색안경을 낀 바깥 사람들의 귀청을 때리지 못했다. 마을 주민 이인숙(49)씨는 “지금만 됐어도 경찰과 기자들에게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했을 텐데, 그때는 모두 흥분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은 ‘결핵균’과 비슷해 유전이 되지 않고, 리팜피신이라는 치료약 4알만 먹으면 전염력이 99% 사라진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센병 치료가 끝난 병력자들일 뿐이었다. 지난해 12월 현재 등록된 한센인 수는 1만6290명이지만, 환자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성 환자는 2%인 346명뿐이다. 그때 이씨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이를 둔 학부모였다. 병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는 여고 2학년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고 운동화 끈을 매려는데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처음엔 손에 쥐가 났겠거니 했다. 며칠 지나 비슷한 일이 되풀이됐다. 병원에서는 ‘한센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결국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대구 애양원에 입소했다. 이씨는 “그때 일을 보고 애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팔달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사람들과 말다툼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친구들이 던진 돌에 머리가 깨져 돌아왔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품에 안고 대구와 부산 친척집으로 위장전입을 시켰다. 거짓으로 판명난 뒤에도 언론 몰매 제보는 거짓으로 판명됐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언론은 ‘나환자, 언론사 난입 간부 납치’(<서울신문> 1992년 8월22일치), ‘주민들 기자 등 25명 감금·폭행’(<매일신문> 1992년 8월22일치), ‘취재기자 폭행·납치 방관 경찰청 책임자 문책하라’(<영남일보> 1992년 8월24일치) 등의 기사들을 토해내며 주민들을 두들겼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이장 김씨는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인기 변호사에게 찾아갔더니, ‘나는 능력이 없어 사건을 맡을 수 없다’고 고개를 돌렸다”고 말했다. 김영애(39)씨는 그때 결혼한 지 갓 1년이 지난 새색시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사람들은 그를 ‘미감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감아는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정부가 한센인 2세들을 부르던 꼬리표다. 그는 “개구리 사건이 터지자 시댁 어른들을 대할 때마다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혼할 때도 집안 식구들을 못 오게 했거든요. 처음에는 시댁 어른들 입에서 친정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떨려 말을 못할 정도였어요.” 그나마 김씨 사정은 나은 편이다. 그의 친구(39)는 ‘개구리 사건’이 터진 뒤, 시댁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 김아무개(26)씨는 “그때 아이들이 니네 아빠는 살인범이라고 놀려대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양계업은 궤멸적 타격 입어 망가진 것은 주민들의 삶뿐이었을까. 마을 주민들의 생계수단인 양계업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칠곡 농원은 전국에 흩어진 한센인 정착촌 89곳 가운데서도 역사가 긴 편에 속한다. 정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대구시 대명동 공동묘지에 천막을 치고 살던 환자 30여명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주민들의 정착촌은 1962년 국립 칠곡병원으로 개편됐고, 1969년 12월15일에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불편한 몸으로 마을에 도로를 놓고 집과 축사를 세웠다. 정부는 병원을 폐쇄하면서 이곳에 남기로 결심한 주민 391명에게 한 사람 앞에 병아리 100마리씩 분양해 생계 밑천을 삼도록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병아리를 키워 하루에 닭 30만 마리에서 24만개의 달걀을 뽑아낸다. 신씨는 “그때 양계업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며 “개구리 사건만 터지지 않았어도 마을 주민들의 생활 기반이 잡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주민 서성용씨는 “사건이 터진 뒤, 계란을 사가던 중간상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팔리지 않는 계란은 모두 폐기 처분됐다. 주민들은 이때 진 빚과 이따금 터지는 조류독감 파문 등으로 수천만원씩 빚을 안고 산다. 이인숙씨는 “우리집만 해도 빚이 1억이 넘는다”며 “이자만 해도 매년 1천만원꼴”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어디 차별받고 사는 게 우리만의 일이겠냐”고 말했다. 사람들은 ‘한센인’ 하면 가장 먼저 소록도를 떠올리지만, 국립 소록도 병원에 입원한 환자 수는 700명을 조금 넘는다. 2004년 12월 현재 한센인 1만6290명 가운데 35.0%인 5717명이 전국에 흩어진 89개 정착촌에 모여 산다. 개구리 사건으로 칠곡 주민들의 고통이 도드라졌을 뿐, 한센 정착촌을 바라보는 바깥 사람들의 시각은 바뀌지 않는다. 한센인들의 인권보호단체인 ‘한빛복지협회’가 지난 4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맡겨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센인 807명 가운데 89.0%가 정착촌에 사는 것을 숨겨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착촌 거주를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숨긴 이유로는 ‘일반인들에게 환자로 낙인찍혀 따가운 시선을 받을까봐’가 62.8%로 높았고, 그 다음으로 ‘자녀들에게 피해가 갈까봐’(32.6%) 등이었다. 67.9%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 86.0%는 이곳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관련자료 모두 폐기”발뺌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2년 9월26일 대구 와룡산 기슭에서 발견됐다. 소년들의 유골은 그들이 살던 곳에서 3.5km 정도 떨어진 야산 중턱 골짜기에서 낙엽에 뒤덮여 있었다. 누명이 벗겨진 뒤, 주민들은 사건을 지휘한 대구경찰청 수사과로 찾아가 ‘당시 자료가 있으면 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은 그들에게 “시간이 너무 지나 관련 자료가 모두 폐기됐다”며 “억울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문제를 더 이상 키우지 말아달라”고 답했다. 주민들은 “어떻게든 그때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보상받고 싶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7월5일부터 사흘 동안 칠곡농원을 찾아 그동안 받아온 인권 차별 실태와 관련해 인권순회상담을 벌이고, 한빛복지협회 등 한센인 인권보호단체들은 한센인 인권침해 보상과 생활안정금 지원 등을 뼈대로 한 ‘한센인 인권 및 복지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 중이다. 13년 만이다. 주민들의 한맺힌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까. 신소식씨는 “정부나 언론이 옛 상처를 건드려 우리에게 더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괜히 긁어 부스럼이나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론이 우리를 폭도로 몰았다” [인터뷰/ 이장 김이근씨] 사건 이후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위장 전학시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2리 이장 김이근(65)씨는 “‘개구리 소년’ 사건을 겪은 게 평생 동안 지우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됐다”며 “국가기관에게 당한 인권 침해인 만큼 그에 맞는 진상 조사와 보상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1992년 8월21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때도 내가 이장이었고 지금도 이장이다. 우리 마을은 신문이 늦게 들어와 기자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더니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화가 나 기자들을 막아섰다.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본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기자들에게 사건 진상이 드러날 때까지 취재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양쪽의 동의 아래 카메라를 마을 금고에 보관했다. 젊은 사람들이 분을 참지 못해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걸 말리면서 나도 많이 맞았다. 우리가 식사까지 대접했다. 다음날 언론 기사를 보니, 우리를 폭도처럼 몰아붙였더라. 기가 막혔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나. 거짓 제보에 기초한 수사와 보도였기 때문에 우리가 무고하다는 결론은 금방 나왔다. 주민들이 허위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로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언론사나 정부로부터 어떤 사과나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 사건이 마을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그날 이후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보도가 나올 때마다 현장을 찾아가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더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나. 그때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가족들은 지금도 내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을 싫어한다.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면 여러모로 사회생활하는 데 피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을 이장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일 이후 위장전입을 통해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전학시켰다. 84명을 구덩이에 파묻다 한센인들을 둘러싼 비극, 오마도 간척사업에서 비토리섬 사건까지 한센인들은 진상 규명과 보상이 시급한 한센인 관련 과거사로 △오마도 간척 사업 △비토리섬 사건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 △기타 국가에 의해 행해진 차별과 편견 등을 꼽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으로 유명해진 오마도 사건은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소록도 한센인들이 농지 330만평 확보를 위해 인근 오마도 간척 사업을 벌이다 완공 직전에 군사정권의 개입으로 쫓겨난 사건이다. 1964년 7월25일 공사권이 전라남도로 넘어갔고, 1993년 4월부터 외지인들에게 매각됐다. 비토리섬 사건은 1957년 8월28일 경남 사천 영복원에 정착한 한센인들이 농사를 지으러 섬 건너편 비토리섬에 들어갔다가, 섬 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한센인 28명이 학살당한 참사를 말한다. 한센인을 둘러싼 가장 큰 비극은 해방 이후 소록도의 치안 공백 상태에서 벌어진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이다. 국립 소록도병원이 1996년 펴낸 <소록도 80년사>를 보면, “병원 운영권을 쥐고 간호 주임 오순재·송희갑과 다툼을 벌이던 의사 석사학이 환자들을 부추겨 1945년 8월21일 밤 난동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다음날 간호 주임들은 섬 밖에서 치안대원들을 불러 환자 대표 84명을 죽인 뒤 구덩이에 파묻고 송진유를 부어 불태웠다. 이 밖에 진상 조사가 이뤄져야 할 사건으로는 80년대까지 계속된 단종수술(정관수술) 등이 있다. 해방 이전에 있었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 변호인단이 2004년 8월 소록도 입소자 117명의 위임을 받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소록도 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결심 공판은 7월19일에 열리고 9월 중순께 선고가 예정돼 있다. “올해 2월부터 수돗물 들어와요” 기반시설 미비로 크고 작은 사고 끊이지 않는 칠곡농원 경북 칠곡농원 뒤쪽 빈터에 가면 덩그러니 놓인 위령탑 하나가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위령탑은 단기 4289년(1956년) 8월13일 지방의회의원 투표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중 갑자기 내린 비로 목숨을 잃은 25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센인 정착촌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오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로·전기·상수도 같은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아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지난해 전남 나주 ㅎ농원 등 한센인 정착촌 10곳의 주거환경을 살펴본 결과, 조사 대상 건축물 1340개 가운데 95.6%인 1281개가 무허가 건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사대상 1455가구(2800명) 가운데 313가구(21.5%)에는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땅에서 퍼올린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고, 하수도 보급률은 61.9%(902개)밖에 안 됐다. 이 때문에 한센촌에서 키우는 가축의 분뇨가 땅에 스며들어 지하수가 오염됐을 가능성이 크다. 칠곡농원에서도 수돗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올해 2월부터다. 마을 이장 김이근(65)씨는 “도에서 우리가 먹던 지하수의 수질 검사를 해보니 ‘부적합’ 판정이 나와 얼마 전 공동수도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민들 가운데 결석이나 맹장염을 앓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6월28일 <한겨레21>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던 주민 3명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주민 이인숙(49)씨는 요로결석, 이장 김씨는 쓸개 결석과 맹장염, 주민 안영칠씨는 요로결석과 맹장염으로 각각 수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