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하나 소개해요~~~

2012년 1월 6일 | 자전거모임

[서평] 자전거는 환경이 아니라 자유와 자율을 상징한다 <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일리히전집3) 박홍규, 이반 일리히(Ivan Illich) | 미토 | 20040329 나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자주 고민하는 사항이다. 이미 1년도 훨씬 전부터 기본적인 이동수단을 자동차에서 ‘도보 + 대중교통’으로 바꾸었고 집안에서 에어콘을 제거했으며, 난방도 ‘외출’ 밖에 설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이동(교통)에 대한 고민을 계속된다. 무언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내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했고 내 삶에 있어서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 가닥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KTX와 고속도로 등과 우리나라의 교통.수송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도 많았다. 일차적인 문제의식은 물론 ‘토건발전’ 패러다임과 토건시스템으로 인한 ‘부정부패’다. 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인프라)는 현 정권 들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국가 정책과 예산의 사익화’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무리한 토건사업을 추진하고 국가의 세금으로 외국계 회사(또는 재벌회사)에게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책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 정치권의 성격이나 구성원과 관계없이 이러한 사회간접시설 투자가 계속 이루어지는 상황의 이면에는 국민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무관심 또는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늘 있었다. 저자는 그런 문제제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Energy and Equity’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공평)’이다. 즉, 이 책은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평등’을 고찰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너지의 양적인 확대,발전이 생산을 향상시키고 생활을 산업화시키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이룩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산업사회의 ‘신화’이며 ‘오류’라고 주장한다. 곧 그것은 사회적 ‘공정(공평)’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산업 중에서 교통을 예로 들어 ‘속도’를 패러다임으로 하여 에너지-소비의 한계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18세기 경 서구에서 시작하여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근대화(또는 현대화)란 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에너지 중독 내지 속도 중독이 이미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도 기술 산업화를 향한 ‘발전’과 ‘개발’이 초래한 에너지의 찬미와 과잉소비는 자연파괴를 가속화시켰고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아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자신의 일관된 논리로서 근현대 산업사회가 초래한 하나의 법칙을 주장했다. “산업생산물이 어떤 것이던 간에 1인당의 양이 일정한도를 넘기게 되면 욕구의 충족에 대한 근원적인 독점이 발휘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동을 뜻하는 ‘교통’, 신진대사 에너지의 소비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통행’, 기타의 에너지원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수송’을 구별한다. 그리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이 깨어진 산업적 교통을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에 의해 복구시키고자 한다. 대안의 방향은 참여를 통해 수송의 속도에 제한을 가하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역자인 박홍규교수는 ‘역자 해설’에서 이에 더하여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에 대한 명확하게 대가를 요구해야 함을 주장한다. 보행자와 주민의 피해 보상과 권리 획득, 환경훼손에 대하여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이용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70년대 기준으로만 보아도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곧 수송수단을 제조하고, 움직이게 하며, 그 주행, 비행,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2억 9천의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에만 할당하고 있는 연료는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목적에 사용하고 있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이 가속을 촉진하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가 아무리 높아지고, 수송수단이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안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수송수단에 의해 하루 평균 32km정도를 움직이고 있으나 이러한 수송수단은 사실상 반경 8km 이하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송수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발은 결코 지면에 닿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은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자신이 급속도로 수송되어 갈 때에 창밖을 흘러가는, 직접 접촉할 수 없는 풍경을 자기의 활동범위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영토를 확립하고 그것에 스스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힘을 우리는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시간에 가치를 부여할 때 공정성과 수송수단의 속도는 반비례한다. 무제한의 속도는 엄청난 고가이고, 그에 비례하여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어지고 있다. 고속은 극소수 인간의 시간을 거액의 값으로 자본화시키지만, 동시에 불합리하게도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노상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의 5분의 4는,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결코 없는 통근자와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이 보내는 시간이다. 한편 회의나 휴양지에 가기 위하여 이용하는 항공기 비행거리의 5분의 4는, 매년 정해진 인구 중 동일한 1.5%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가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는 사례로 들어가 보자.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은 자기의 차와 관련해 1년에 1,600시간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가 달리고 있을 때에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차 속에 앉아 있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주차한 차를 찾기도 한다. 또한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고속도로 통행료,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시의 벌금 등을 지불하기 위해 노동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 4시간은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숫자는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즉 사고로 병원이나 검?경찰, 법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에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 광고를 보거나 소비자 교육집회에 참가하여 소비하는 시간 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결국 전형적인 미국인은 7,500마일을 달리는 데에 1,600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는 시속으로 치면 5마일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수송산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시속 5마일 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라도 걸아갈 수 있다. 이미 1천8백만대가 넘는 자동차를 보유한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걷도록 만들어졌다.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걸음이다. 그리고 길은 인간의 걸음터였다. 인간의 걸음은 그 본래의 기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걷는 기능, 걷는 권리가 쇠뭉텅이 기계에 의해 박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4,500만의 걸음을 단 몇 백만 대의 자동차가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동차화된) 가속도의 무익성을 주장하며 자전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 3~4대 빠르고 현실에서 종합적인 계산으로 따지면 자동차보다 빠르다. 또한 공간 점유, 도로 구성, 제반 설치/운영비용, 사고와 환경 등 간접비용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 전차보다 인간에게, 사회에게 유리함을 설명해 놓았다.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요약하면,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곧 높은 에너지 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오염이 없는 에너지가 발견된다고 하여도 한계를 넘는 에너지의 사용은 인간을 정치적으로 불능으로 만들고 자율적 공생사회를 위한 조건들을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소위 정치적인 ‘좌파’나 ‘진보주의자’들도 받아들이는 ‘발전, 성장,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히 저작은 모두 ‘타율적 관리’ 사회에 대한 ‘자율적 공생’ 사회의 대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책 역시 타율화된 학교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관료화된(타율화된) 병원제도가 만들어낸 병원(病原)에 대해 다룬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처럼 자율화된 인간을 지향하는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히는 최적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그 한도를 정치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리히는 산업의 근본적 독점으로부터의 해방은 최적교통의 옹호를 기초로 한 정치과정에 사람들이 참가한 경우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한 몇 개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 특히 ‘근원적 독점’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사회의 근본적 문제,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99% 일반대중의 자유와 자율성 상실, 중앙집중의 가속화와 분권화의 실패 등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주장하는 ‘산업사회의 근원적 독점’은 경제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 독점’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행정, 문화, 미디어(여론), 과학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치와 행정분야는 ‘엘리트 독점’이란 현상으로, 문화 역시 ‘산업화,상품화’와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자본과 엘리트에 의한 독점’으로, 미디어와 여론 역시 마찬가지의 독점 현상이, 과학기술 분야 역시 ‘전문기술관료 독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산업생산양식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에너지 및 ‘이동의 자율’과 관련하여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음력 설 이전에 자전거를 구해 나의 ‘자율적인 이동’ 거리를 더 늘리는 것이리라…^^ [ 2011년 12월 30일 ]